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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느와르 영화란 범죄, 폭력, 음울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장르로, 국내외 주요 작품을 거의 다 섭렵하고 나서야 이 영화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처음엔 주인공 비주얼부터 "이게 무슨 느와르야?" 싶었는데, 다 보고 나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느와르를 다 보고 나서야 만난 영화
저는 한때 느와르 장르에 꽤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장르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필수로 꼽히는 작품들은 물론이고, 국내 독립영화까지 뒤지다 보니 어느 순간 "이제 볼 게 없네" 하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킬링타임용으로 건드린 게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독립영화(Independent Film)란 대형 배급사나 제작사의 자본 없이 소규모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독립영화란 상업적 흥행보다는 감독의 시선과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래서 오히려 날것의 느낌이 살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영화도 그랬습니다. 출연진 중에 아는 배우가 거의 없었고, 영화관 개봉 여부조차 불분명한 작품이었으니까요.
제가 직접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당황했던 건 주인공 동도(이재응)의 외모였습니다. 흔히 느와르 장르에서 기대하는 정우성 스타일의 날카로운 인상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
동도의 선택, 그 시절 누구나 품었던 동경
동도는 영화 감상이 취미인, 아버지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사는 평범한 아이입니다. 먹이사슬 최하위층에서 누구에게나 만만한 상대로 지내던 그가 같은 반 반장 현승(차엽)과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변해갑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캐릭터 아크란 주인공이 처음과 끝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적 곡선입니다. 동도의 아크는 꽤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이 갑니다. 조용히 영화만 보던 아이가 친구에게 담배를 선물하고, 엄마에게 거짓말로 용돈을 타고, 절친 대현과 멀어지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쌓입니다.
이런 흐름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 시절 남자아이들이 실제로 갖고 있던 동경을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싸움 잘 하고 무리를 이끄는 사람, 그런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 저도 비슷한 정서를 알고 있기에, 동도가 바보 같은 선택을 반복해도 답답하다기보다는 아련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또래 집단 내 서열화와 동조 압력은 단순한 영화적 설정이 아닙니다. 청소년기 또래 관계에서 발생하는 동조 현상은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으로, 전문가들도 이 시기의 집단 귀속 욕구를 정상적인 발달 과정으로 봅니다(출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동철이라는 인물, 그리고 폭력의 구조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건 동철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처음엔 그냥 무서운 일진 정도로 읽히는데, 보다 보면 이 인물도 피해자라는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동도를 화장실로 끌고 가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연이 앞에서 자존심을 짓밟고, 친구인 덕화에게도 용서를 강요하는 동철. 그런데 정작 집에 돌아가면 형에게 꼼짝 못 하고, 아버지조차 형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 안에 갇혀 있습니다. 밖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집에서는 더 큰 폭력 앞에 무너져 있는 모습. 이 설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꽤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폭력의 재생산(Reproduction of Viole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폭력의 재생산이란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그 패턴을 내면화해 다시 타인에게 행사하는 악순환 구조를 의미합니다. 동철이의 행동이 정확히 그 구조를 보여주고 있고, 영화는 이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기만 합니다. 그 여백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동철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예상보다 훨씬 안정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은 현승에게 다구리를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같이 맞아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 하나로 동철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빌런에서 입체적인 인간으로 바뀌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청소년 폭력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또래 집단 내 권력 서열이 폭력의 구조를 결정한다
- 가해자 역시 다른 공간에서는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 방관자(동도 포함)는 폭력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도 구조 안에 포함된다
- 자존심과 체면이 폭력을 지속시키는 감정적 동인이 된다
독립영화가 잡아낸 18살의 질감
영화적 완성도만 놓고 보면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상업영화에 비해 편집과 촬영의 세련됨은 떨어지고, 일부 씬은 연결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색함이 오히려 18살이라는 나이의 질감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내러티브 밀도(Narrative Density)란 이야기 안에 사건, 감정, 인물 변화가 얼마나 촘촘하게 들어차 있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내러티브 밀도란 단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는가입니다. 이 영화는 그 밀도가 높은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느슨하게 흘러가는 구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느슨함이 당시 청춘의 시간감과 닮아 있습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돌아보면 그냥 어슬렁거리다 끝난 하루 같은 그 느낌.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영화는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체감이 크게 달라집니다. 저는 느와르를 한 사이클 돌고 지쳐 있을 때 봐서인지, 오히려 자극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이 영화의 템포가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청소년 시기의 정서적 경험이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도 꾸준히 축적되고 있습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또래 관계에서의 부정적 경험이 성인기 대인 관계 패턴에 영향을 준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영화 속 동도가 성인이 된 후 현승과 고구마를 팔러 다니는 마지막 장면이 그냥 훈훈한 엔딩이 아니라, 그 시절을 버텨낸 사람들의 이후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설프게 놀 거면 시작도 하지 마." 영화 안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이 말이, 사실 그 시절 가장 어설펐던 건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어설펐고, 다들 불안했고, 다들 그냥 버텨냈습니다.
느와르 마니아라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고, 저처럼 뭔가 자극적이지 않은 청춘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한 번쯤 틀어볼 만합니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나서 한동안 뭔가 아련한 감정이 남는 영화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