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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6월 3일 지방선거 날, 투표소를 나서면서 "저 안에서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겠지" 싶었거든요. 2022년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는 제 생일날 영화관에서 봤던 작품인데, 선거 날이 되니 자연스럽게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생일날 극장에서 만난 선거 막후의 세계
코로나 시기라 영화관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굳이 찾아가서 봤던 영화가 킹메이커였습니다. 제 생일이기도 했고, 마스크를 쓰고 앉아 스크린을 보면서도 내내 몰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극장을 나왔을 때 "이게 실화 기반이라고?" 싶어서 한동안 멍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선거 전략가 엄창록을 모델로 합니다. 영화 속 김운범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서창대는 엄창록을 각색한 인물입니다. 엄창록은 당시 선거판에서 "선거판의 여우"라 불렸던 인물로, 그가 실제로 구사했던 선거 전술들이 영화 속 장면들의 뼈대가 됩니다.
영화는 1960년대 목포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킹메이커(kingmaker)란 권력을 직접 쥐지 않고 실력자를 왕좌에 올리는 배후 실세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자신은 빛나지 않으면서 타인을 빛나게 만드는 사람이고, 영화는 바로 이 역할을 맡은 서창대라는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시대 배경인데도 불구하고 몰입이 됐던 건, 그 시대의 선거판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킹메이커가 보여주는 선거 장면들은 단순한 연설이나 지지 호소가 아닙니다. 상대 진영이 뿌린 선물을 탈취해 자기 진영 이름으로 바꿔치기하는 장면, 정전을 틈탄 개표 공작에 대응하는 장면 등 소위 선거 공작(election manipulation), 즉 공식적인 선거 운동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음지의 전술 싸움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선거 공작이란 유권자의 판단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개표 과정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실제로 저랬다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설경구와 이선균, 두 배우가 채운 빛과 그림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선거 영화 특유의 딱딱함을 걱정했는데, 두 배우의 호흡이 그 걱정을 처음 30분 안에 지워버렸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이선균 배우가 연기한 서창대는, 화면에 등장하는 매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의 연출 방식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명암 대비를 활용한 시각 언어였습니다. 명암 대비(chiaroscuro)란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를 통해 피사체의 입체감과 감정을 표현하는 촬영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그 기법을 단순한 미장센을 넘어 서사의 도구로 씁니다. 서창대가 "그림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화면은 실제로 그 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설경구가 연기한 김운범 역시 흔들림 없는 무게감으로 극을 받쳤습니다. 제 경험상 이 두 배우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순간들이었습니다. 수미쌍관(首尾雙關) 구조, 즉 영화의 시작과 끝을 같은 이미지나 이야기로 묶어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서사 기법도 이 영화에서 특히 잘 작동했습니다. 달걀 도둑에 관한 우화가 오프닝과 엔딩을 관통하면서 "목적과 수단" 사이의 질문을 던집니다.
킹메이커를 보기 전 알아두면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배경 지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포 지역구 선거 이력 (1963년 국회의원 첫 당선)
- 1960~70년대 민주공화당 vs 신민당 구도
-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논란 (1969년)
-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 (1971년)
이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들어가면 영화 속 인물들의 선택이 왜 그토록 절박했는지가 더 명확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은 1960~70년대를 권위주의 통치(authoritarian rule)가 강화된 시기로 분류하는데, 권위주의 통치란 선거나 의회 같은 민주적 절차를 형식적으로 유지하되 실질적인 권력은 특정 세력이 독점하는 정치 체제를 말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은 영화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딱 한 가지가 아쉬웠습니다. 목포 연설 장면의 배경 합성이 눈에 띄게 어색했던 것입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연출하려 했는데, 기술적인 한계가 살짝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색함이 이선균의 연기 앞에서 묻혀버렸습니다. 배우의 존재감이 화면의 흠을 덮을 수 있다는 걸 그 장면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또 하나, 영화 후반부 대통령 선거 에피소드에서는 앞부분에 비해 힘이 약간 빠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영화가 "정치"보다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는 구조적 선택에서 비롯된 한계입니다. 서창대와 김운범의 결별이 사실상 감정적 클라이맥스이고, 대선 결과는 그 여파에 가깝습니다. 관객으로서는 뜨거운 결말보다는 쓸쓸한 마무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저는 그 쓸쓸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가 됐습니다.
2022년 개봉 당시 킹메이커의 최종 누적 관객 수는 약 100만 명 수준에 그쳤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흥행 성적이 아쉬웠다는 평이 많았는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선거 날을 맞아 이 영화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투표소 앞에 줄을 서면서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전부가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거와 정치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그리고 두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신다면 킹메이커는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보셔도 무방할 만큼 선정적 장면이 없고, 묵직한 질문 하나를 오래 안고 가게 만드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