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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지훈과 박성웅이라는 조합, 흥신소와 검사라는 설정을 보는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먼저 들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기대치가 낮았던 탓인지,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불법과 합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하이브리드 수사 방식이 이 영화의 핵심 재미입니다.
뻔할 것 같았던 설정, 실제로 보니 달랐다
일반적으로 한국 범죄 영화의 주인공은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나 검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런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영화는 갈수록 피로감을 줍니다. 젠틀맨의 주인공 지현수는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영웅이 아닙니다. 의뢰 성공률 높은 흥신소 사장이 우연히 교통사고로 검사 신분증을 손에 넣고, 살기 위해 그 신분을 이용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설정이 억지스럽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황당함을 오히려 무기로 씁니다. 신분 세탁(identity laundering), 쉽게 말해 타인의 법적 지위를 도용해 특권을 행사하는 행위를 주인공이 거리낌 없이 활용하는 장면들이 불편하기는커녕 통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대상이 훨씬 더 큰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지훈과 박성웅이 비슷한 역할로 자주 캐스팅되는 것을 보면서 늘 "또?"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됐습니다. 두 배우가 갖는 온도와 질감이 이런 장르에 잘 맞아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요.
하이브리드 수사가 만들어내는 짜릿한 몰입감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수사 방식 자체입니다. 현수는 흥신소 직원들의 불법 해킹, 도청, 미행이라는 음지의 기술 위에 검사의 합법적인 압수수색 권한을 얹어버립니다. 여기서 압수수색(compulsory search and seizure)이란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증거물을 강제로 확보할 수 있는 형사소송법상의 권한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영화는 기존 한국 범죄물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르 영화에서 수사는 절차를 밟는 쪽(경찰·검찰)과 그것을 비웃는 쪽(범죄자)으로 나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젠틀맨은 그 경계를 주인공 스스로 지워버립니다. 증거재판주의, 즉 유죄를 입증하려면 법정에서 인정되는 적법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형사소송의 기본 원칙을 현수는 철저히 무시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시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젠틀맨에서 하이브리드 수사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흥신소 네트워크를 활용한 불법 미행 및 잠입
- 해커를 동원한 검찰 내부 시스템 해킹과 커넥션 추적
- 검사 신분을 이용한 합법적 정보 접근과 공식 수사 병행
- 감찰부 검사 김화진과의 음지·양지 합동 수사
이 구조가 영화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맞물리면서 속도감이 살아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부분에서 상영 내내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빌런 권도훈이 무서운 진짜 이유
악당 권도훈은 뒷골목 조폭이 아닙니다. 최고급 슈트를 입고 클래식을 들으며 대형 로펌 한유의 대표 변호사로 행세하지만, 그 뒤에서는 정재계 인사를 대상으로 한 로비(lobbying), 즉 특정 이익을 위해 권력자에게 금전이나 향응을 제공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조직적으로 운영해온 인물입니다. 500억대 주가 조작과 세금 탈루로 쌓은 자금을 바탕으로 중앙지검장까지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었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반복되는 권력형 비리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 캐릭터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법을 도구로 쓴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들이 약물 투여(drug-facilitated crime) 이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범행이 이루어졌다는 설정이 현실 범죄와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약물 투여 범행이란 피해자에게 수면 유도 혹은 의식 저하 약물을 몰래 주입해 저항 능력을 빼앗는 범죄 수법을 말합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이른바 데이트 폭력 및 성범죄 관련 약물 사용 사건이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해당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영화가 이 지점을 건드리는 방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차갑게 서술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사이다 결말이 통쾌한 이유, 그리고 아쉬운 점
결말은 명쾌합니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현수의 계획이었다는 반전이 나오고,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장면과 함께 권도훈은 빈털터리가 됩니다. 스위스 비밀계좌(Swiss numbered account)란 계좌 소유자의 신원을 철저히 익명으로 유지하는 스위스 은행의 특수 계좌로, 과거 역외 탈세나 불법 자금 은닉에 자주 활용되던 방식입니다. 현실에서 이런 결말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요점이기도 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관객 분석에 따르면 국내 범죄 장르 영화에서 관객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 여부라는 점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젠틀맨은 그 공식을 충실히 따릅니다.
다만 호불호는 분명히 갈릴 것 같습니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크고, 법적 절차에 민감한 분들에게는 주인공의 행동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가볍게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크게 걸리지 않았는데, 그 기대치 조절이 관람 만족도에 꽤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젠틀맨은 현실적인 수사 절차를 기대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뉴스를 보면서 답답했던 적 있는 분, 권력형 비리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본 적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주연뿐 아니라 조연진의 연기도 탄탄하고,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현재 wavve와 U+tv모바일에서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