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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는데, 검표 직원이 없더라고요. 자율 입장에 좌석 확인도 셀프였습니다. 텅 빈 객석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깨끗하게 날아갔습니다. 유튜브에서 먼저 들었던 노래가 스크린 속에서 흘러나오자마자,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를 뻔했습니다. 《와일드 씽》은 그렇게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없던 그룹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레트로 감성

    《와일드 씽》이 개봉 전부터 남달랐던 건 뮤직비디오 선공개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극 중 아이돌 그룹 트라이앵글의 노래를 영화 개봉 전에 먼저 유통시켜, 관객이 극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 곡에 익숙해지도록 만든 방식입니다. 이걸 업계 용어로 프리릴리즈 마케팅(Pre-release Marketing)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프리릴리즈 마케팅이란 콘텐츠의 일부를 본 공개 전에 먼저 배포해 소비자의 관심과 친밀감을 선점하는 전략을 말합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 그게 이 전략의 핵심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게 효과가 있더라고요. 저는 영화관에 앉기 전부터 이미 트라이앵글의 노래를 몇 번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크린에서 그 곡이 흘러나오는 순간, 낯선 가상의 그룹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실제로 활동했던 팀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영화가 그 시대의 디테일을 기가 막히게 복원해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세기말 감성의 칼 단발머리, 새빨간 힙합 패션, 과장된 무대 매너까지 2000년대 초반 아이돌 문법을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여기서 아이돌 문법이란 특정 시대의 아이돌 그룹이 공유하던 외형적 스타일, 무대 매너, 콘셉트 코드 등의 관습적 표현 방식을 통칭합니다. 이 시대 재현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관객은 트라이앵글을 허구의 존재로 보지 않고 실제로 존재했던 팀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레트로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가 30~40대 핵심 관객층에게 강한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점은 이미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배우 앙상블이 만들어낸 코미디 완성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랐던 건 배우들의 앙상블이었습니다. 앙상블(Ensemble)이란 여기서 복수의 배우가 균형 있게 각자의 역할을 소화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연기 방식을 뜻합니다.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끌기보다 각자의 색깔이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강동원이 연기한 황현우는 과거 트라이앵글의 리더로 비보잉(B-boying) 출신입니다. 비보잉이란 힙합 문화에서 비롯된 브레이크댄스의 한 장르로, 물구나무서기, 스핀 등 고난도 체기술을 포함하는 스트리트 댄스 형식입니다. 그 몸이 이제는 삐걱거리는 설정 자체가 코미디의 출발점이 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이렇게까지 가볍게 망가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가볍게 망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캐릭터가 더 살아납니다.

    엄태구가 연기한 구상이는 랩 실력보다 미련이 앞서는 인물입니다. 재능이 애매한데 끼를 버리지 못하는 그 비애를, 엄태구는 사랑스럽게 그려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는 자칫 민망함만 남기기 쉬운데, 엄태구는 그 경계를 절묘하게 탔습니다.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오정세였습니다. 39주 연속 음악방송 2위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가진 발라드 가수 최성곤 역으로, 그는 등장할 때마다 분위기를 뒤집었습니다. 특히 장발에 흰 셔츠 차림으로 히트곡 '너를 좋아해'를 열창하는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킬링 파트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웃기고, 두 번째엔 '설마 또 한다고?' 하며 웃고, 세 번째엔 관객이 먼저 기다리게 됩니다. 이 반복 개그 구조를 콜백 코미디(Callback Comedy)라고 합니다. 콜백 코미디란 앞서 등장한 장면이나 대사를 이후에 다시 소환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기법으로, 관객이 그 패턴을 학습한 뒤 기대감으로 웃게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영화가 코미디로서 제 기능을 다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동원의 자기희화화가 B급 코미디 톤을 견인합니다
    • 엄태구의 미련 가득한 캐릭터가 공감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 오정세의 콜백 코미디가 영화의 에너지를 끝까지 유지시킵니다
    • 박지현이 과장 없이 현실감 있는 톤을 유지해 앙상블의 균형을 잡습니다

    슬랩스틱을 뚫고 남는 감정, 이 영화의 진짜 완성도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슬랩스틱(Slapstick)으로만 밀어붙이다가 감정 없이 끝나는 거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슬랩스틱이란 신체적 충돌, 넘어지기, 과장된 리액션 등 몸으로 만들어내는 물리적 코미디 장르를 말합니다. 이 방식은 빵 터지면 최고지만, 한 번 실패하면 기세가 완전히 죽어버리는 양날의 검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는 실패한 개그 이후에도 기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뻔뻔한 무기입니다. 유치할 때는 확실히 유치하고, 촌스러울 때는 그 촌스러움을 당당하게 밀어붙입니다. 덕분에 몇몇 소동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영화 전체의 리듬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클라이맥스 무대가 화려한 방송 무대가 아니라 지방의 '엑스포 유치원 콘서트'라는 점도 이 영화가 선택한 일부러 초라한 결말입니다. 처음엔 그 규모에 웃음이 나오지만, 막상 그들이 그 조명 아래 서는 순간 감정이 뒤집힙니다. 거창한 무대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작지만 단단한 응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 관람 환경도 이 감정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OTT로 혼자 봤다면 지금만큼 재밌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장면은 제가 먼저 웃고, 어떤 장면은 옆 관객이 웃고, 또 어떤 장면은 다 같이 터지는 집단 관람의 효과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화 관람 경험에서 관객 간 감정 공유가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서사가 더 깊어질 여지가 있었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캐릭터의 내면이 좀 더 촘촘하게 쌓였더라면 마지막 감정이 더 깊이 박혔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빈 자리를 배우의 표정과 노래로 채웠고, 그게 충분히 통했습니다.

    결국 《와일드 씽》은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그걸 끝까지 책임진 영화였습니다. 레트로 감성이 통하고, 노래가 귀에 맴돌고, 배우들이 확실히 망가져 주는 코미디를 원한다면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혼자보다는 함께, 조용히보다는 웃음 소리가 오가는 환경에서 볼수록 더 빛나는 영화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Aza6d8Nd4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