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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심리 스릴러 장르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닙니다. 때리고 부수는 액션이 체질에 맞는 사람이라, 영화관 앞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한채영 배우의 8년 만의 스크린 복귀. 그 설렘 하나로 극장 문을 열었는데, 나오는 길에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왔습니다.
8년의 공백, 한채영이 돌아온 맥락
한채영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건 드라마 쾌걸춘향이었습니다. OST로도 유명했던 그 작품을 보면서 완전히 팬이 됐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래서 이번 복귀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감이 상당했습니다.
영화 악의 도시는 인기 스타 강사 유정이 사교성 좋아 보이는 사업가 선이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심리 스릴러(Psychological Thriller)라는 장르의 특성상, 단순한 사건 전개보다는 인물 간의 심리적 긴장과 갈등이 서사의 핵심 엔진이 됩니다. 여기서 심리 스릴러란 물리적 폭력보다 인물의 내면적 공포와 불안, 심리적 조작을 통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르를 뜻합니다. 관객이 캐릭터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야 비로소 극적 효과가 살아나는 구조입니다.
영화가 다루는 핵심 소재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입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판단력과 현실 인식을 교란해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심리적 통제와 지배 행위를 말합니다. 실제로 영화 속 선이라는 인물은 유정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척 접근하면서 서서히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고, 기억을 부정하며,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과정을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패턴으로 보여줍니다. 이 소재만큼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짚어볼 가치가 있는 주제였습니다.
한채영 배우는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한 미모를 보여주었고, 스크린 위의 존재감도 건재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 역시 시간이 비껴갔나' 싶은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시나리오 분석 — 소재는 좋았는데 왜 힘이 빠졌나
제 경험상, 좋은 소재가 좋은 영화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악의 도시가 딱 그 경우였습니다.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Dating Violence)이라는 사회적으로 예민하고 중요한 소재를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극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어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약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혹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서적·성적 폭력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국내에서도 매년 피해 사례가 보고되는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실제로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폭력 피해 경험률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영화가 아쉬웠던 지점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정이 선이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심리적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 주연인 유정의 감정선이 중반부에서 극적 전환점 없이 정체되는 느낌을 줍니다.
- 강수라는 인물이 사건을 해결하는 축으로 기능하는데, 그의 과거 서사가 본편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서 주인공 유정의 서사가 묻힙니다.
- 소시오패스(Sociopath)적 인물로 설정된 선이의 행동이 충격적인 장면 위주로만 소비되어, 심리적 공포보다는 장면의 자극성에 기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시오패스란 타인의 감정과 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가진 인물 유형을 뜻합니다. 이런 인물이 가스라이팅의 주체가 될 때 영화적 공포는 배가될 수 있는데, 선이라는 캐릭터는 그 가능성에 비해 입체감이 부족했습니다.
배우가 직접 연출을 겸한 도전 자체는 의미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사건을 거치면서 내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극적 흐름이 유정에게서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심리 스릴러 장르의 흥행 성패는 주인공의 심리적 밀도와 직결된다는 분석이 있을 만큼, 이 장르에서 캐릭터 구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가스라이팅 피해, 영화 밖에서도 직시해야 하는 이유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장르적 완성도보다 오히려 소재 자체에 더 오래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영화 속 유정처럼 처음에는 상대방의 친절을 호의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경계가 무너지고 통제당하는 상황이 현실에서도 얼마나 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스라이팅의 가장 무서운 특성은 피해자 스스로가 피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영화에서도 유정이 "사람을 너무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대사가 실제 가스라이팅 피해 심리를 꽤 정확하게 반영했다고 느꼈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도록 학습되는 과정, 그게 바로 심리적 통제의 핵심 메커니즘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삼은 만큼, 관객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야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서사가 마무리된 느낌이었습니다.
한채영 배우의 팬이라면,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크린 복귀 자체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한 번쯤 볼 만합니다. 다만 작품성과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감이 클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이번 도전이 한채영 배우와 현우성 감독 모두에게 더 단단한 다음 작품의 발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8년의 기다림에 걸맞은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