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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바둑이라는 소재를 들었을 때 초등학교 때 억지로 배우러 다니다 부모님 몰래 도망쳤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정우성이 나온다는 말에 결국 극장으로 향했고,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습니다. 바둑이 소재인 영화가 이렇게 거칠고 속도감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바둑판과 도박판이 만나는 세계

    영화 '신의 한 수'는 바둑 실력자가 불법 내기 바둑 도박판에 연루되며 형을 잃고, 7년의 수감 생활 끝에 복수를 실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바둑 대국보다는 그 주변을 둘러싼 범죄 조직의 암투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바둑은 세계관을 구성하는 장치이고, 실질적인 장르는 한국형 느와르 액션입니다.

    여기서 느와르(noir)란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계를 배경으로 인물의 욕망과 배신,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 장르를 의미합니다. 범죄 조직의 위계 구조, 음지에서 벌어지는 생존 싸움 같은 요소들이 느와르의 핵심입니다. 국내에서는 '아저씨', '범죄도시' 계열의 영화들이 이 장르를 대표하죠.

    제가 이 장르의 매니아 쪽에 가깝다 보니,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날 것 그대로인 액션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칼부림이 나오고 폭력이 여과 없이 묘사되는 장면들이 있는데, 불편함보다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했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도록 바둑 장면에 등장하는 손은 실제 프로 바둑 기사가 대역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디테일 하나가 영화 전체의 밀도를 다르게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영화 속 바둑 전략과 스토리의 연결고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사활(死活), 대마(大馬), 복기(復棋), 그리고 장생(長生)이 그것입니다.

    사활이란 바둑에서 돌 무리가 살 수 있는지 죽는지를 판단하는 문제를 뜻합니다. 영화 속 냉동 창고 장면에서 탈출 비밀번호를 사활 문제로 제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인물의 생사가 실제로 걸린 상황과 맞물립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연출이었습니다.

    대마(大馬)란 바둑판 위에서 넓은 영역에 걸쳐 연결된 큰 돌 무리를 의미합니다. 감옥 장면에서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주인공의 처지를 바둑 용어로 빗댄 표현입니다. 의외로 이런 대사들이 글자 그대로 읽혀서 오히려 힘이 있었습니다.

    복기(復棋)란 한 판의 바둑이 끝난 뒤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며 수를 되짚는 행위를 말합니다. 감옥 안에서 낡은 바둑판 앞에 앉아 혼자 복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복수를 준비하는 인물이 자신의 실수를 되짚는 모습이, 바둑의 복기 개념과 정확히 겹쳤거든요.

    영화 속 바둑을 둘러싼 핵심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법 내기 바둑판: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 원을 걸고 벌이는 도박 형태로, 조직화된 범죄 집단이 배후에 있음
    • 선수(選手): 내기판에서 직접 대국을 담당하는 실력자. 연기력과 기력을 동시에 갖춰야 함
    • 훈수(訓手): 대국 밖에서 수를 지시하는 역할. 영화에서는 전파 장치를 통한 원격 지시로 묘사됨
    • 에이스 기사: 실전 바둑 기사 출신으로, 조직의 결정적인 승부에만 투입되는 인물

    바둑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 중 일수불퇴(一手不退)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한 번 놓은 돌은 절대 물릴 수 없다는 바둑의 기본 원칙인데, 영화 속 악당이 이 룰조차 무시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그 인물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바둑 영화인데 바둑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즐겨야 할까

    이 영화를 두고 "바둑 영화인데 바둑이 너무 없다"는 반응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 부분이 살짝 걸렸습니다. 바둑의 수 읽기나 전략적 묘미를 기대하셨다면 솔직히 기대치를 조금 낮추는 게 맞습니다. 바둑은 이 영화에서 장르를 구별하는 배경 요소이지, 드라마의 핵심 동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요.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장르 분류 기준으로 보면 '신의 한 수'는 액션 스릴러에 해당합니다. 바둑 영화로 접근하면 실망할 수 있지만, 치밀하게 설계된 복수극으로 접근하면 완성도가 충분히 느껴집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복수극 구조의 핵심은 적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압박해 나가느냐입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각 악당을 상대하는 방식을 바둑의 단계별 포석(布石)처럼 배치했습니다. 여기서 포석이란 바둑 초반에 전체 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며 돌을 배치하는 전략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인공이 감옥에서 나온 뒤 동료를 한 명씩 끌어모으고, 도박판에 위장 침투하고, 단계적으로 적을 제거하는 흐름이 바로 이 포석의 구조와 닮아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바둑이 대중에게 가깝게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는데, 한국기원의 집계에 따르면 그 시기 바둑 입문자 수가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기원). 그 무렵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것도, 대중이 바둑이라는 소재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시기가 잘 맞았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릴 때 바둑 학원에서 도망쳤던 기억이 이 영화 하나로 상당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이 이렇게 생존과 전략의 은유로 쓰일 수 있는 소재라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거든요. 이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라고 하면, 바로 그겁니다. 억지로 배웠던 바둑이 싫어서 도망쳤던 사람이 영화 한 편 덕분에 바둑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것.

    액션 영화를 좋아하거나 느와르 장르에 익숙한 분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바둑을 모르더라도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바둑 용어들이 대사로 쓰일 때 그 의미를 살짝 알고 가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보기 전에 사활이나 복기 같은 기본 용어 몇 가지만 짚어두고 들어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KqLd2Y3Y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