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큰 기대 없이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차태현, 남상미 주연의 2014년 영화 '슬로우 비디오'입니다.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통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다시 봤는데도 여운이 쉽게 가시질 않았습니다.
동체시력이라는 설정, 왜 이렇게 마음에 걸렸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붙잡힌 건 주인공 여장부(차태현)의 신체적 특성이었습니다. 그는 동체시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인물입니다. 동체시력(dynamic visual acuity)이란 움직이는 물체를 얼마나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시각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 빠르게 지나가는 사물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힘인데, 주로 야구 선수나 격투기 선수처럼 반응 속도가 중요한 운동선수들에게 강조되는 항목입니다.
그런데 여장부의 경우 이게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달해 있어서, 달리면 눈앞 세상이 슬로모션처럼 느려져 보이고 그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해 쓰러집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봉수미에게 달려가다 넘어지는 장면이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웃고 넘겼다가 나중에야 그 장면이 얼마나 많은 걸 담고 있었는지 실감했습니다. 능력이 오히려 삶을 막아버리는 아이러니를 그 한 장면에 다 압축해 놓은 거였습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억지로 드라마틱하게 끌고 가지 않습니다. 김영탁 감독은 동체시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CCTV 관제센터라는 공간과 연결시킵니다. 관제센터란 도시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TV, 즉 CCTV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사건·사고를 예방하고 추적하는 시설입니다. 보통 영화에서 CCTV는 범인을 추적하는 스릴러적 도구로 쓰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선택합니다. 화면 속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돌봐주는 눈으로 기능하게 만듭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정말 감탄했던 건, 관제센터 직원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아이를 체크하거나, 길에서 술 취해 잠든 사람을 걱정하는 방식으로 CCTV를 대하는 장면들입니다. "저 아저씨 아직도 자고 있네"라는 짧은 대사 하나가 이 영화 전체의 온도를 설명해 줬습니다. 세상이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위협이 아니라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당시 슬로우 비디오는 약 4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상업적으로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가 덜 알려진 이유가 오히려 이 영화의 미덕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고 자극적인 걸 원하는 관객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 동체시력: 움직이는 물체를 정확히 포착하는 시각 능력. 여장부에게는 이것이 삶을 가로막는 장벽이자, 세상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보는 재능
- CCTV 관제센터: 영화 속에서 감시의 공간이 아닌 이웃을 지켜보는 따뜻한 눈으로 재해석된 공간
- 슬로모션 시점: 여장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느리게 흘러가는데, 이것이 영화 전체의 톤과 리듬을 결정
차태현이 달리는 장면, 그 장면 하나로 다 됐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 차태현 아니었으면 됐을까? 제 경우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여장부는 어린 시절부터 선글라스를 벗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으며 집에만 틀어박혀 TV를 벗 삼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 긴 고립의 시간 끝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사람 특유의 서툼과 순수함을 차태현은 과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꽤 좋아하지만, 슬로우 비디오에서의 연기는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 후반,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상황에서 봉수미(남상미)가 위험에 처하자 무작정 달려가는 장면. 평생 달리면 쓰러지던 사람이 눈앞이 캄캄한 채로 달려가는 그 장면에서 제가 흘린 눈물은, 억지로 짜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건강한 눈물을 흘렸다는 느낌이 정확히 그 장면에서 왔습니다.
남상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수미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인물인데, 꿈과 현실 사이에서 치이면서도 특유의 당당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다소 퉁명스럽게 느껴지던 봉수미가, 나중에 다시 보니 그 퉁명스러움이 전부 상처에서 온 방어기제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영화를 두 번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조연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오달수가 연기한 병수는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인물입니다. 여장부에게 세상의 사용법을 조금씩 알려주는 캐릭터인데, 연애 고수인 척하지만 매번 삐걱거리는 모습이 웃음을 주면서도 묘하게 안쓰럽습니다. 공익근무요원(사회복무요원)이란 현역 복무 대신 공공기관 등에 배치되어 사회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는 병역 이행 형태를 말합니다. 고창석이 연기한 안과의사 석 박사는 여장부에게 사실상 아버지 같은 존재로, 눈이 점점 나빠지는 상황을 함께 감당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습니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상의 템포 자체가 느린 편이라 OST가 더욱 도드라지는데, 저는 영화 보는 내내 음악이 장면과 너무 잘 들어맞아서 뭔가 힐링받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음악 선택도 감독이 꽤 공을 들인 부분이라고 합니다. 리얼리티를 의도적으로 낮추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영화의 전략과 음악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가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장부가 봉수미의 정체를 숨겨왔다는 반전은 큰 충격을 주진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플롯이었고, 그 지점에서 감동이 살짝 희석된 것도 사실입니다. 로맨스 라인이 좀 더 풍성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느리게 살기'를 예찬하는 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그 아쉬움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됩니다.
영화 리뷰 아카이브 사이트인 출처: IMDb - Slow Video (2014)에서도 이 영화의 독특한 정서에 대한 해외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빠름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그 속에서 이 영화처럼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작품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슬로우 비디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주요 OTT 플랫폼에서 시기에 따라 제공 여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왓챠, 티빙, 웨이브 등에서 검색해 보시는 걸 권합니다. 스트리밍이 안 될 경우 DVD 구매나 일부 VOD 서비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Q. 슬로우 비디오가 너무 심심하다는 평이 많던데 재미있나요?
A. 빠른 전개와 강한 자극을 기대한다면 분명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영화의 매력은 중반쯤 지나서야 서서히 쌓이는 편입니다. 느린 호흡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그 잔잔함이 오래 남는 여운을 만들어 줍니다.
Q. 동체시력이 실제로 그렇게 발달할 수 있나요?
A. 동체시력은 훈련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시각 능력 중 하나로, 실제로 야구 선수 선발 등에 활용됩니다. 다만 영화 속 여장부처럼 달리면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보여 쓰러질 정도의 설정은 창작적 과장입니다. 이 과장이 오히려 영화의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 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Q. 차태현 말고 다른 배우들 연기는 어떤가요?
A. 제가 경험상 이 영화의 조연들이 생각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달수의 병수 캐릭터는 웃기면서도 따뜻하고, 고창석의 안과의사 역도 작지만 단단한 존재감을 줍니다. 남상미도 초반의 퉁명스러움 뒤에 감추어진 감정을 꽤 잘 표현했습니다.
결론
슬로우 비디오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조미료 없이 심심한 맛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 심심한 맛이, 요즘처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는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10년 전에 처음 봤을 때도 만족스러웠지만, 최근에 다시 봤을 때는 그때와는 다른 지점에서 마음이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영화가 더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분명히 기억할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냥 지나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시간을 내볼 만합니다. 빠르게 결론이 나는 영화가 아니니 느긋하게, 주인공의 눈처럼 천천히 보는 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