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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와르 영화에서 건달이 멋있어 보인다면, 그건 영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뜨거운 피'는 그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꽤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정우 배우가 느와르라니,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정우가 건달이 된다는 것

    착하게 생기고 어딘가 까불거릴 것 같은 이미지가 정우 배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캐스팅 소식을 접했을 때 '이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솔직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봤는데, 이 의심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습니다.

    정우가 연기한 희수는 소위 말하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해가는 궤적이 선명한 인물입니다. 나이 마흔에 쌓아둔 것 하나 없이 조직 밑에서 굴러온 건달이 서서히 균열을 내는 과정을 정우는 과장 없이 소화해냈습니다. 거칠게 소리치는 장면보다 술 한 잔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손영감 역의 김갑수 배우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양반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화면에 무게가 생깁니다. 젊은 시절에도 여러 작품에서 존재감이 강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눈빛 하나로 대사를 압축해버리는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승현, 최무성, 윤지혜, 그리고 아미 역의 이홍내까지, 배우 라인업만 보면 이 영화는 흠이 없습니다.

    느와르 장르의 관습과 이 영화의 선택

    느와르(noir)란 원래 프랑스어로 '검다'는 뜻으로, 영화에서는 도덕적으로 모호한 인물들이 운명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 장르를 가리킵니다. 한국 느와르는 여기에 조직 세계의 의리와 배신, 지역 정서를 얹은 형태로 발전해왔습니다.

    '뜨거운 피'는 이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배신 못 하는 의리남, 술집 여자와의 묘한 관계, 엘리트 건달과의 대립 구도. 전형성이 짙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관객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저도 이 부분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1993년이라는 배경 자체가 올드한 것은 납득이 되지만, 그 시대를 풀어내는 연출 방식이 2022년의 시선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줬느냐 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각도 있습니다. 느와르가 전형적이어야만 느와르답다는 것입니다. 장르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곧 장르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점이죠.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이 영화를 볼 때 기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느와르 영화에서 관객이 주목하는 요소를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 인물 간 갈등 구조와 배신의 설득력
    • 액션 연출의 밀도와 현실감
    • 주인공의 내면 변화와 공감 가능성
    • 지역 정서나 시대 분위기의 재현

    이 기준으로 보면 '뜨거운 피'는 위 네 항목 중 세 번째까지는 어느 정도 합격선을 넘깁니다. 배신의 설득력과 액션 연출의 밀도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설 원작의 그림자, 연출의 한계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작가 천명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천명관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첫 연출작입니다. 원작 소설은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암이라는 변두리 포구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삶이 촘촘하게 얽혀 있습니다.

    각색(adaptation)이란 원작의 서사 구조와 핵심 주제를 유지하면서 다른 매체에 맞게 변환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은 특히 분량 압축이 관건인데, 600페이지를 120분 안에 담으려다 보니 인물들의 관계성이 얕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아야 하는지, 감정의 뿌리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은 채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 여럿 있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산과 항구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은 그 평가에 동의합니다. 1993년이라는 시대를 복원해낸 미술과 의상은 눈에 거슬리지 않았고, 구암이라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반면 사운드 마스터링(sound mastering), 즉 최종 음향 믹싱과 균형 조정 작업의 결과물은 논란이 있습니다. 짙은 부산 사투리가 때로 뭉개지듯 들려서 대사를 놓치는 경우가 몇 군데 있었습니다. 발음의 문제인지 음향 작업의 문제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극장에서 볼 때 자막 없이는 온전히 따라가기 어려운 장면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한국영화산업에서 느와르 장르는 꾸준한 관객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범죄·느와르 계열 한국 영화는 연간 개봉작 중 꾸준히 상위 장르를 유지하고 있으며, 관객들의 선호도 역시 안정적입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마흔의 건달이 낯설지 않은 이유

    이 영화에서 제가 예상치 못하게 공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희수가 마흔이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느끼는 공허함입니다. 건달이라는 직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마흔을 앞뒤로 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감각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20년 동안 뭘 해온 거지?' 하는 질문은 조폭 세계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야"라는 대사는 문학적 겉멋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으로 읽었습니다. 다만 그 대사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앞까지의 과정이 더 촘촘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중년기에 접어드는 시점의 남성들은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재평가를 강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영화 속 희수의 갈등이 관객에게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피'는 배우들의 열연이 시나리오와 연출의 빈틈을 상당 부분 메운 영화입니다. 완성도 있는 느와르를 기대한다면 다소 아쉬울 수 있고,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를 우선으로 본다면 충분히 시간을 쓸 만합니다. 한 번쯤은 봐두면 좋을 작품이되, 두 번 찾게 될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우 배우의 다음 선택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GJByWFlr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