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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흑금성이라는 인물을 그냥 교과서 속 단어처럼만 알고 있었습니다. JSA에서 2년간 복무하면서 북한을 코앞에서 바라봤던 사람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관객들은 오죽했을까요. 영화 공작은 실제로 있었던 대북 공작 작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 보고 나서 제가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실화의 무게: 흑금성 작전의 배경

    영화의 배경이 된 흑금성 작전은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북한 권력층에 침투시킨 실제 대북 공작 작전입니다. 안기부란 지금의 국가정보원(NIS) 전신으로, 당시 국내외 정보 수집과 대공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입니다.

    공작원 박성영은 안기부로부터 신분 세탁, 즉 레전드(legend) 구축을 지시받습니다. 레전드란 첩보 용어로, 공작원이 적국에 침투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완벽한 가짜 신분과 이력을 가리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고 빚쟁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것이 모두 침투 간첩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철저한 위장이었다는 사실은, 저처럼 군 생활을 했던 사람이 봐도 쉽게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자기 희생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첩보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액션이나 첨단 장비를 떠올리기 쉬운데, 공작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빗나갑니다. 제 경험상 실제 군 현장에서도 첩보 업무는 조용하고 지루하며 심리전의 연속입니다. 영화는 그 감각을 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7년 대선까지 이어지는 작전의 타임라인을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 정세를 알아야 합니다. 1993년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이 작전의 핵심 동기가 되었고, 이 시기 북핵 문제는 이미 국제사회의 최대 화두였습니다(출처: 외교부 북핵 관련 자료).

     

    첩보기법으로 읽는 핵심 장면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첩보 기술이 얼마나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극적 재미를 위해 각색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제로 공작원들이 쓰는 기법들이 꽤 사실적으로 녹아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첩보기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도청 및 역도청: 호텔 방에 심어진 도청기를 역으로 이용해 녹음기를 착용하고 상대를 기록하는 장면. 이른바 양방향 감시전이 펼쳐집니다.
    • 자백제 투여: 혈액 채취를 빌미로 마취제와 함께 자백제를 투여하는 장면은 실제 정보기관에서 쓰던 심문 기술입니다. 자백제란 피투여자의 억제력을 낮춰 무의식적으로 진술하게 만드는 약물을 의미합니다.
    • 이중 신호(사인): 위장에 도청장치가 있는 상황에서 눈빛이나 몸짓으로 경고를 전달하는 장면은 비언어적 암호 전달, 즉 논버벌 코드(non-verbal code)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 레전드 구축: 신용불량자라는 신분을 만들어 북한 공작원들의 의심을 피하는 장기 위장 작전.

    제 경험상 JSA 복무 중에도 상황 판단을 몸짓 하나로 전달하는 훈련을 받았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괜히 반갑고 긴장이 됐습니다. 그냥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북한의 대외경제위원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권력층 접촉 장면도 주목할 만합니다. HUMINT(인간정보)란 기술 장비가 아닌 사람을 통해 수집하는 정보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HUMINT의 세계를 그립니다. 박성영이 리명운에게 접근하는 과정, 신뢰를 쌓기 위해 짝퉁 고려청자를 처분해주는 장면, 롤렉스 선물 등 모든 장면이 철저히 인간 대 인간의 심리전입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실제 대북 공작의 상당 부분이 이런 인적 네트워크 구축에 의존해 왔습니다(출처: 국가정보원).

     

    몰입감의 정체: 배우와 연출이 만든 긴장의 밀도

    이 영화를 두고 "지루하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총 한 방 없이 이 정도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게 저는 훨씬 어려운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박성영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입니다. 자백제를 맞은 상태에서도 정체를 지키고, 총구 앞에서도 논리로 맞서고, 술을 권하는 김정일 앞에서도 "통일이 되면 기꺼이 받겠다"는 말을 태연하게 뱉어냅니다. 이런 장면들은 배우의 내공 없이는 절대 살릴 수 없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황정민의 표정 연기는 말 한마디보다 더 많은 걸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리명운 역의 이성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체제에 충성하면서도 내면에서 흔들리는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섬세했습니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체제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으로 그려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북한 관련 영화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에 기댄다고 알려져 있는데, 공작은 그 공식을 의도적으로 깨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JSA에서 북한군과 불과 수십 미터 거리에서 마주하다 보면, 상대방도 결국 사람이라는 감각이 생깁니다. 이 영화는 그 감각을 스크린에 꺼내놓은 몇 안 되는 작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리명운이 박성영에게 넥타이 핀을 건네며 '호연직기'라고 새겨진 글자를 보여주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호연지기란 맹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어떤 두려움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와 큰 기상을 의미합니다. 적과 아군이 갈리는 첩보의 세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다는 것, 그 장면 하나가 2시간짜리 영화의 무게를 다 정리해줬습니다.

    영화 공작은 첩보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액션 대신 심리전과 인간 드라마로 승부하는 방식이 낯설 수 있지만, 실화라는 무게가 모든 장면에 깔려 있어서 허투루 볼 수가 없습니다. JSA 복무 시절을 떠올리며 봤더니 감회가 남달랐는데, 북한을 먼발치에서라도 마주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더 진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개인적으로 100점 만점에 80점을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mPMS8srZ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