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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싫어하는 저도 결국 보게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2016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밤, 빗소리를 멍하니 듣다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아마 곡성에 비 내리는 장면이 워낙 많아서였겠죠. 단순한 공포 이상의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 곡성을 다시 꺼내봤습니다.
공포영화가 싫은 저를 극장으로 끌어낸 이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공포 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보고 나서 밤에 잠을 못 자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곡성은 흥행 성적과 입소문이 워낙 대단해서 결국 큰 마음을 먹고 봤습니다. 2016년 개봉 당시 국내 관객 수는 약 688만 명을 기록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권에 올랐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제가 직접 봤을 때 느낀 건, 이 영화가 단순한 귀신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오컬트 스릴러(Occult Thriller)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오컬트란 초자연적인 힘이나 악령, 주술 등을 소재로 삼은 장르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귀신이 나와 놀라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의심과 혼란을 통해 관객을 심리적으로 조여드는 구조입니다. 그 밀도가 예상을 훨씬 넘어서 있었습니다.
곡성의 배경은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마을에 정체 모를 일본인 외지인이 나타난 시점부터 이상한 살인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집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발진과 두드러기가 퍼진 채 이성을 잃고 타인을 공격하다 사망하는 패턴을 반복합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살(煞)인데, 살이란 한국 전통 무속 신앙에서 사람에게 들러붙어 불운과 죽음을 불러오는 악한 기운 또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이 영화의 공포 구조 전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주인공 종구가 끌어내는 감정 이입의 힘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는 주인공 종구를 전형적인 강인한 경찰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겁이 많고 소심하며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설정이 오히려 영화 전체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습니다.
관객이 종구에게 이입하는 건 그가 영웅이라서가 아닙니다. 딸이 아파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평범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곽도원 배우의 연기는 그 무력함과 공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현해서, 저도 화면 너머로 같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종구가 내리는 선택들, 즉 굿을 중단시키거나 무명의 경고를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들은 보면서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돌아보면, 저라도 그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무서운 점입니다. 관객도 어느새 종구처럼 잘못된 선택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나홍진 감독이 설계한 서사 구조, 심리적 압박의 정체
곡성을 단순히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 위대한 영화로 만드는 건 나홍진 감독의 서사 구조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 장치는 서사적 모호성(Narrative Ambiguity)입니다. 서사적 모호성이란 이야기 안에서 선악,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 관객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일본인 외지인은 악마인가, 아니면 무당인가. 흰옷 여인 무명은 수호자인가, 악귀인가. 황정민이 연기한 무당 일광은 해결사인가, 공범인가. 156분 내내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계속 뒤집힙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영화가 끝난 후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건지, 슬픈 건지, 화가 나는 건지 감정 정리가 안 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황정민의 굿 장면은 압도적입니다. 이 굿 장면에 등장하는 개념이 살풀이 무속 의례인데, 살풀이란 사람에게 붙은 악한 기운이나 저주를 쫓아내기 위한 무속 의식을 뜻합니다. 종구의 딸 효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굿 장면을 교차 편집한 방식은, 관객에게 어느 쪽이 진짜 공격이고 어느 쪽이 진짜 치료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손에 땀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한국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곡성의 서사 구조는 자주 분석 대상이 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곡성을 2010년대 한국 영화 중 서사 실험성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곡성이 한국 공포 장르에 남긴 것
곡성을 본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시 보면 또 새로운 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복잡한 영화라서가 아니라, 관객이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완전히 다른 전제를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일본인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며 봤고, 두 번째에는 무명이 실은 악귀가 아닐까 의심하며 봤습니다. 두 번 다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곡성이 한국 오컬트 장르에 끼친 영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한국 전통 무속 신앙을 현대적 공포 서사와 결합한 장르 공식을 확립했습니다.
- 서사적 모호성을 활용해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공포 구조를 제시했습니다.
- 소시민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감정 이입 기반의 심리 공포를 구현했습니다.
- 156분 러닝타임이라는 장편 구성을 통해 공포의 밀도를 점진적으로 쌓는 방식을 보여줬습니다.
15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의도적으로 열어놓은 결말이 호불호를 나누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불친절함이 오히려 곡성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계속 무섭습니다.
곡성은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도 한 번쯤은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단, 각오는 하고 보셔야 합니다. 보고 나서 며칠은 일본인이 진짜인지, 무명이 진짜인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 테니까요. 저처럼 비 오는 날 밤에 갑자기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