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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흥행은 초라했지만, 느와르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교과서처럼 회자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6년 장진 감독의 <거룩한 계보>가 바로 그 작품입니다. 저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열 번은 넘게 봤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에서 감정이 걸립니다. 한국 느와르의 '한'과 '정'을 이렇게 담아낸 영화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한국 느와르의 재해석

    <거룩한 계보>는 개봉 당시 손익분기점에도 미치지 못한 채 극장에서 내려왔습니다. 저도 처음엔 입소문으로 접했습니다.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뒤늦게 DVD로 만난 영화였는데, 첫 장면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영화의 장르는 느와르(noir)입니다. 느와르란 범죄, 배신, 운명적 비극을 주축으로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구축하는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한국 느와르는 여기에 '정(情)'이라는 정서를 얹어, 인물 간의 유대감이 오히려 비극을 더 아프게 만드는 독특한 문법을 갖고 있습니다. <거룩한 계보>는 그 문법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 중 하나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영화는 호남 조폭계의 칼잡이 동치성이 조직의 명령으로 살인 혐의에 연루되고, 검사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채 7년 징역형을 선고받는 데서 출발합니다. 배신하지 않는다는 선택이 오히려 모든 비극의 도화선이 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마주하는 사형수 정순탄, 실세 박문수, 그리고 밖에서 벌어지는 배신의 연쇄. 이 영화는 조폭 액션처럼 보이지만 사실 의리와 배신이라는 인간적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역대 작품 데이터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 한국 느와르는 <달콤한 인생>(2005), <친구>(2001)의 흥행 이후 유사 장르물이 쏟아지던 시기였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 홍수 속에서 <거룩한 계보>는 오히려 역행했습니다. 세련된 미장센(mise-en-scène)보다 인물의 감정선을 택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세트, 의상, 배우의 위치까지를 아우르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화려하게 꾸미는 대신 날것의 질감으로 승부했고, 그게 제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캐릭터가 만들어낸 감정의 무게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저라면, 저를 믿어준 사람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을까? 아마 그 질문이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만드는 힘일 것입니다.

    정재영 배우가 연기한 동치성은 대사보다 눈빛으로 말하는 인물입니다. 특히 부모님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도소 안에서 접하는 장면,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혼자 삭이는 그 분노와 슬픔은 대사 한 줄 없이도 관객을 압도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정재영 배우의 등 근육 하나하나가 연기를 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류승룡 배우가 연기한 정순탄도 인상적입니다. 사형수(死刑囚), 즉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수감자로 등장하는 그는 이미 삶을 체념한 듯 보이지만, 정작 탈옥의 기회가 왔을 때 가장 먼저 달리기 시작합니다. 류승룡 배우 특유의 야수 같은 에너지가 그 장면에서 폭발하는데, 저는 그 순간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장진 감독의 연출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적 감각입니다. 블랙 코미디란 죽음, 폭력, 절망 같은 어두운 소재를 아이러니하게 비틀어 웃음을 유발하는 장르 기법을 말합니다. 전투기 F-16이 교도소에 추락해 탈옥이 성사된다는 황당한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보통이라면 몰입을 깨뜨릴 장면인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비장미를 배가시킵니다. 이미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충분히 깔아놨기 때문에, 황당함이 슬픔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장진 감독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연출입니다.

    이 영화가 <친구>, <달콤한 인생>과 함께 거론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케일은 작지만, 감정의 밀도는 그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거룩한 계보>가 특별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느와르 장르이면서도 남자들의 우정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
    • 정재영, 류승룡의 눈빛과 몸 연기가 대사를 압도하는 배우 중심의 영화
    • 블랙 코미디와 비극이 공존하는 장진 감독 특유의 장르 혼합 연출
    • 스케일보다 감정선에 집중한 투박하지만 진한 영화적 질감

    요즘 나오는 느와르 영화들은 비주얼 스타일링이 세련되고, 액션 퀄리티도 높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보고 나서 오래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거룩한 계보>는 보고 나면 한동안 친구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런 뜨거운 유대를 나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오래 남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인물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뜻합니다. 동치성은 조직의 충실한 칼잡이에서 출발해, 배신과 폭력을 거쳐 마지막엔 텅 빈 눈동자로 죽은 친구를 끌어안는 인물로 마무리됩니다. 그 아크가 너무나 정교해서, 엔딩의 회상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대사 하나가 꽂힙니다. "이상하게도 비를 맞은 기억이 한 번도 없다." 분명히 비도 오고 바람도 불었을 텐데, 함께한 시절엔 맑은 날만 기억된다는 그 대사. 저는 이 대사 하나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거룩한 계보>는 현재 디지털 복원 아카이브에 수록되어 보존 중인 작품입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그만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느와르를 좋아하신다면, 혹은 오래된 친구가 문득 그리워진다면, <거룩한 계보>를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친구>나 <달콤한 인생>과 함께 이어서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세 편을 연달아 보고 나면, 한국 느와르가 왜 세계에서 독보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naLdhfqmHM